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문단 편집) == 작업 == 그의 기록은 해부학, 역학, 공학, 식물학, 조경 분야 등 미술뿐 아니라 정말 다방면에 이름이 남아 있다.[* Fritjof Capra, '다 빈치처럼 과학하라', 강주헌 옮김, 김영사, 2011] 그러나 다 빈치가 관심을 가졌던 방대한 분야에 비하면 실제로 만들어지거나 남아있는 작품의 숫자는 적은 편이다. 게다가 본인이 작품에 서명하지 않았던 탓에 다 빈치의 작품인지 아닌지 이견이 갈리며 불확실한 작품들이 많다. 거기다가 워낙 본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보니 다 빈치와 딱히 관련이 없는데도 아무데나 다 빈치가 관여했다는 소문이 붙어버리는 상황이다. 예를 들면 근거가 전혀 없음에도 일반적으로 [[스파게티]] 면이나 [[포크]]까지 발명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포크는 [[고대 이집트]] 시절 유물에서도 확인이 가능한, 인류가 사용한 오래된 식기류 중 하나이고, [[동로마 제국]]에서 처음 상용화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태어나기 100여 년 전의 인물인 [[샤를 5세]] 또한 금과 은으로 만든 포크를 가지고 있음이 확인 되는 만큼 포크 자체를 발명한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포크가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전파 된 데에는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국가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유명한 발명가인 다 빈치가 발명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듯하다.][* 스파게티면도 마찬가지로 [[고대 로마]]의 유물 중에 스파게티틀이 발굴되어 다 빈치의 발명품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자전거의 스케치라고 알려졌던 것도 후대의 분석 결과 원래 안경을 그린 스케치에 후대의 누군가가 자전거 핸들과 안장, 페달을 덧그려 자전거로 바꾼 것으로 밝혀졌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1374px-Mona_Lisa,_by_Leonardo_da_Vinci,_from_C2RMF_retouched.jpg|width=100%]]}}} || || 그의 유명한 작품인 [[모나리자]] ||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Peter_Paul_Ruben's_copy_of_the_lost_Battle_of_Anghiari.jpg|width=100%]]}}} || || 앙기아리 전투의 [[페테르 파울 루벤스]] 모사본. ([[밀라노 공국]] 대 [[베네치아 공화국]]) ||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attachment/leonardodacecilia.png|width=100%]]}}} || || [[흰 담비를 안은 귀부인]] ||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자기소개서]]에선 대부분을 군사용 공격 병기를 구상해 이야기하였고, 그림의 재능을 마지막에 소개했지만 오늘날 다 빈치의 그림 실력은 그의 능력 중 높게 평가되는 부분이다. 그가 남긴 그림은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한 것들이다. 그는 그림 실력 그 자체로써도 출중했지만, '''새로운 화법의 실험'''이라는 면에서 높게 평가할 만한 인물로, 자신의 그림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 최초로 기름을 사용한 [[유화(미술)|유화]]를 시도한 화가들 중 하나였다.[* 단 그는 유화보다는 템페라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그 결과로 모나리자에서 공기 원근법을 처음으로 구사해내는 등 좋은 결과도 여러 차례 얻어냈다. <암굴의 성모>나 <[[흰 담비를 안은 귀부인|에르마인을 안고 있는 숙녀]]>는 르네상스 최고의 초상화로 손꼽히는 명작들이다. 반대로 지나치게 실험정신이 투철했던 나머지 [[프레스코]] 그림에 프레스코와는 상극인 유화 기법[* 유화는 습기와 열에 극도로 취약한데, 프레스코화는 회칠을 한 벽면에 그리는 그림이다.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려야 하기 때문에 벽면이 당연히 '''습기'''로 축축하며, 회반죽이 굳으며 화학반응이 일어나 '''열'''이 발생한다.]을 써서 그림이 그대로 녹아내리는 바람에 망치는 일도 있었다(<앙기아리 전투>). 그리는 도중에 그림이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그림을 빨리 말리기 위해 화로까지 동원했지만, 결국 아랫부분 일부를 제외한 작업분이 전부 녹아내리는 바람에 그대로 버려졌다고 한다. 문제는 이 작품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미켈란젤로]]와의 대결작이었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카시나 전투>라는 작품을 그려내지만, <앙기아리 전투>는 현재 라파엘로 등 다른 화가들의 스케치 모사 밖에 남아있지 않다. 본 문서의 앙기아리 전투 그림도 루벤스가 그린 모사본이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attachment/davincilastsupper.jpg|align=center&width=100%]]}}} || || [[최후의 만찬]] || <앙기아리 전투>를 너무 대차게 말아먹어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지만 실험 정신이 지나쳐 망가진 사례는 이외에도 많다. 심지어 유명한 <최후의 만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최후의 만찬은 완벽주의적인 그의 성격으로 당시 유행하던 프레스코 벽화 기법[* 프레스코 기법은 벽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완성해야 하고 수정하기도 매우 힘들기 때문에 완벽주의적인 다 빈치는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때문에 템페라로 그린 최후의 만찬은 역사상 가장 불행한 그림중 하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이 아닌 템페라로 그려져 바로 퇴색이 시작되는 등[* 템페라는 광물을 곱게 갈아서 달걀 노른자와 섞어 만든 물감으로 전통적으로 [[이콘]]을 그리는 데 많이 쓰였다. 다만 이콘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템페라 물감은 변색이 쉽게 되고, 특히 성당같은 경우 항상 초와 향을 쓰기 때문에 그을음이 달라붙어 시간이 지날 수록 새까맣게 변하게 된다. 때문에 아직도 템페라 물감으로 그리는 이콘은 70-80년마다 한 번씩 덧칠을 해준다.] 그의 도전이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대에 확립된 그의 천재 미술가적 이미지는 사실 그의 작품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는 것에 기인하는 바가 매우 크다. 실제로 그가 서양사에 오래토록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과학적 방법론|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금기로 여겨지던 해부를 행하는 등 여러 시도를 통해 인체의 많은 부분들을 실질적으로 관찰해냈다는 것 때문이다. 인간의 태아를 최초로 그린 사람이기도 하고 많은 해부 스케치를 남긴 바 있다. 다 빈치의 스케치인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인체 비례에 대한 상징처럼 여겨질 정도로 유명하다. 다만 이 또한 대표적인 다 반치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우선 르네상스 시대에 교회에서는 인체 해부를 공식적으로 금지한 적도 없고, 실제로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체 해부쇼가 유행할 정도였으며 당시 다른 유명한 화가들도 다들 해부를 하고 해부도를 그렸다. 당장 라이벌(?)인 미켈란젤로만 하더라도 엄청나게 뛰어난 해부도를 남겼다. 애초에 다 빈치의 해부도는 여자의 자궁을 척추와 연결해버리거나 하는 등 동시대 제대로 의학을 배운 이들이 그린 해부도에 비해 뒤떨어지는, 틀린 부분이 상당히 많다. 즉 흔한 레오나르도 과대 평가 떡밥 중 하나이다. 무슨 사회적 터부를 어기면서까지 진리 탐구에 몰두하고 시대를 앞서가고 그런 건 아니란 소리. 오히려 다 빈치의 해부가 불법이었던 건 다 빈치가 정규 의대생이 아니었던 탓이 크다. 그렇게 생전에 완성한 그림이 얼마 되지 않고, 성격이 괴팍하기는 했지만 그 그림 실력 하나만큼은 천재적으로, 그의 스승 안드레오 델 베로키오는 그 당시에 유명한 화가였으나, 자신이 그리던 <그리스도의 세례>를 레오나르도가 몇 가지를 덧붙였는데, 스승 베로키오가 레오나르도의 솜씨를 보고는 '다시는 물감에 손대지 않겠노라'고 맹세한 기록이 있다. 이 당시의 나이가 스무 살. 하지만 실은 베로키오가 재능넘치는 도제에게 더 많은 그림을 위임하고 자기는 수익성이 높은 조각상 제작에 전념하겠다는 사업상의 결정을 내렸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작품을 완성시키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밀라노]]의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동상을 수년간 연구만 하다가 완성하지 못한 일도 있으며, [[오스만 제국]]에는 젊은 시절의 그가 [[메흐메트 2세]]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메흐메트 2세가 그 도무지 끝이 안 보이는 제작기간에 질려서 돌려보냈다는 식의 설화도 있을 정도였다.[* 어린이용 교육책에 종종 올라오는 일화 중에 어느 장수의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은 화가가 '''활 하나만 그리는데 그리고 버리고 그리고 버리고를 반복하다 십년 넘게 걸렸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꼬려고 만든 일화라는 주장도 있다.] 이외에도 오스만 제국 [[보스포루스 해협]]에 다리를 디자인했는데 당시 기술로서는 도무지 이게 만들 수 있냐고 오스만 제국 황실에서 부정적이라 끝내 이뤄지지 못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냥 평범하게 나무로 길쭉한 다리로 만들어진다. 요즘에는 한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 다른 그림에 손을 대었던 것이 [[성인ADHD]]의 증상이 아니었나 하는 해석도 있다. 물론 모두 본인의 잘못은 아니었는데, 예를 들면 [[체사레 보르자]]에게 인정받아 도시 계획의 총책임자급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지만 체사레가 몰락한 탓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또한 목차에는 건축가라 되어 있지만 진짜로 훌륭한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에 비해 다 빈치는 건축 분야에서 딱히 뚜렷한 결과물을 남기지 못했다. 애초에 본인이 설계하거나 감독으로서 건축을 해본 경험 자체가 없다. 물론 건축면에서 큰 발전이 있었던 르네상스 시대인 만큼 레오나르도 역시 건축에 관심이 많았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에서 건축 자문으로 활동하며 건축에 관련된 스케치를 다수 남겼지만, 레오나르도 본인이 독자적인 건축가로 활동하지는 못했다.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의 샹보르 성의 이중 계단에 대한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남겼고, 이 성의 건축가였던 도메니코 다 코르토나가 그것에 따라 설계했다는 '설'이 유명하지만 레오나르도가 그에게 그림을 넘기거나 도메니코가 레오나르도에게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2010년 6월 20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인 Surprise Secret에서는 그가 [[요리사]] [[http://v.media.daum.net/v/20100620123907813|활동]]한 적이 있다고 한다.[* 밀라노 대공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궁정에 있을 때 일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요리를 만들어 평판은 그저 그랬다. 이탈리아 요리는 풍성하면서도 화려한 것을 기대하는데, 레오나르도의 요리는 엔초비 한 마리와 곁들이는 채소 정도로 소박했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었던 것.] 198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발견된 코덱스 로마노프가 레오나르도가 남긴 요리에 관련된 문서이다.[* 대한민국에는 2002년 책이있는 마을에서 '한 천재의 은밀한 취미' 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항목 아래쪽에는 동물을 사랑해서 고기를 먹지 않겠다 라고 했다는데 그 문서에 따르면 글쎄...? 이 내용은 EBS 지식채널e 에서도 다뤘다. 상당히 개그스러운 에피소드.] 2014년 11월 30일자 서프라이즈에서는 그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그림이 후세에 그려진 가짜라는 주장을 다루었다. 레오나르도의 모작을 업으로 하던 화가가 가짜 자화상을 그려서 사기를 치자는 음모에 가담해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속 플라톤의 얼굴을 토대로 그린 것이고, 그의 다른 초상화와 비교해 봐도 얼굴에서 차이나는 부분이 많은데다 그만의 빗금선의 특징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실제로도 다른 초상화는 비교적 샤프한 인상인 데 비해 후덕한 편이기는 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보다 100년 먼저 [[중력]] 실험 연구를 하였다는 스케치가 해독이 되었다. 해당 스케치에는 이탈리아어로 '운동의 등가성'이라고 적혀있는 등 당시의 수학 수준이나 실험도구가 부족한 시대였음에도 중력 가속도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https://m.yna.co.kr/view/AKR20230218007700072?section=international/all|#]] 단, 중력이 가속운동 이라는 것은 이미 르네상스 이전 14세기에도 알려진 사실이었고, 다빈치의 노트는 '그 가속도가 얼마인가?'를 연구한 것이다. 물론 이걸 연구한 것도 대단한 건 맞지만, 물리학 발전에 딱히 구체적으로 기여하질 못했다. 이는 [[두 새로운 과학]]이라는 역학에 대한 [[교과서]]를 써서 후세에 영향을 준 갈릴레오와 비교되는 면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사실 애초에 갈릴레이부터가 중력 가속도에 관한 최초 연구자가 아니었고, 당시 이탈리아 여기저기서 많은 이들에 의해 훗날 뉴턴의 물체 운동론에 기초가 되는 연구들이 자잘하게 사회 일반에 보고되고 그런 소문들이 정착해 갔던 시기이다. 그러나 이론적 배경과 명확한 증명이 불명이었다가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비로소 웬만큼 정돈이 된 것이다. 삼각형이면 구슬들이 일정 속력으로 떨어진다는 건데, 속도와 가속도에 관해 조금만 수리학적으로 정돈해 봐도 면피할 수 있는 착오다. 결론은 다빈치의 노트는 물체운동 이치에 관한 당대의 흔한 오개념들 일부를 다빈치는 그림으로 나타내 본 것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